아바스 칼리파국

이슬람 제국

아바스 칼리파국(/əˈbæsɪd, ˈæbəsɪd/) 혹은 아바스 왕조, 내지는 아바스 제국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세 번째 칼리파국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삼촌인 아바스 이븐 압드 알무타리브의 후손들이 왕조를 개창하였으며, 따라서 왕조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5] 그들은 750년 호라산 일대에서 아바스 혁명을 일으켜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무너뜨렸으며[6] 오늘날 이라크바그다드를 수도로 두고 대부분의 이슬람 영토를 통치했다. 곧 바그다드는 당대 과학, 문화, 발명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슬람에 황금 시대를 가져왔다. 이곳에는 지혜의 집을 포함한 여러 주요한 학술 기관들이 위치해 있었으며,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민족·다종교적인 배경의 여러 학자, 예술가,[7] 문학가, 과학자들을 수용함으로써 "학문의 중심지"이라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바스 칼리파국
الدولة العباسية

 

750년~1258년
1261년~1517년
국기
검은 깃발[a]
수도쿠파
(750년~762년)

바그다드
(762년~796년)

락까
(796년~809년)

바그다드
(809년~836년)

사마라
(836년 ~ 892년)

바그다드
(892년 ~ 1258년)

카이로
(1261년~1517년)
정치
정치체제세습 칼리파제
칼리파
750년 ~ 754년


786년 ~ 809년

1242년 ~ 1258년


1261년 ~ 1262년


1508년 ~ 1517년

아부 알 아바스
(초대)

하룬 알 라시드

알 무스타심
(바그다드 정권 마지막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2세
(카이로 정권 초대 칼리파)

알 무타왁킬 3세
(카이로 정권 마지막 칼리파)
역사
 • 아바스 혁명

 • 사마라의 혼란기

 • 칼리파, 정치적 권력
상실

 • 몽골의 침략

 • 멸망
750년

861년

940년~1258년


1258년

1517년
지리
750년 어림 면적11,100,000 km2
인문
공용어고전 아랍어
(중앙행정)

수많은 지역별 언어
민족아랍인
페르시아인
튀르크인
유대인
베르베르인
콥트인
경제
통화디나르
디르함
팔스
종교
국교수니파 이슬람교
이전 국가
다음 국가
우마이야 칼리파국
다부이드 왕조
맘루크 술탄국
몽골 제국
오스만 제국
지여르 왕조
파티마 칼리파국
부와이흐 왕조

아바스 시대에는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고도화된 관료 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바르마크 가문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 관료들이 대거 등용되어[8] 국가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이들이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차별에 들고 일어나 국가를 세웠던 만큼, 이 시기에 움마에서는 마왈리(비아랍계 무슬림)들의 비율이 점차 늘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8세기 후반을 전후로 하여, 아바스 왕조는 점차 마왈리와 페르시아 관료들을 소외시키기 시작했다.[9][10]

아바스 칼리파들의 정치 권력은 945년과 1055년에 각각 바그다드를 점령한 이란의 부와이흐 왕조와 중앙아시아의 셀주크 제국에 가려져 급격히 감소했다. 비록 종교적인 부분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했던 제국의 영토는 날이 갈수록 축소되기 시작했다. 12세기 후반에 잠시 중흥기를 맞이하여 알 무크타피 치하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배권을 재확인하고 알 나시르 치하에서 페르시아로 확장하기도 했으나,[11] 마침내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 군대가 쳐들어오면서 끝장나게 되었다. 몽골군은 바그다드를 손쉽게 함락시키고 당시 아바스 칼리파였던 알 무스타심을 처형시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때를 아바스 칼리파국의 멸망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명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고, 피신한 방계 친척들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맘루크 술탄에 의한 명목상의 칼리파로 즉위함으로써 왕조를 겨우 이어갈 수 있었다. 비록 정치적인 실권은 없었으머 술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1516년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마침내 1517년[12] 오스만 술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뒤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 알 무타왁킬 3세로부터 칼리파 직위를 계승함으로써, 기나긴 아바스 왕조의 역사가 끝을 맺었다.[13]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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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아랍어الدولة العباسية
(앗 다울라툴 압바시야, Ad-dawlat-ul Abbasiya)
الخلافة العباسية
(알 킬라파툴 압바시야, Al-khalifat-ul Abbasiya)
العباسيون
(알 아바시윤, Al' Eabaasiuwn)
페르시아어خلافت عباسیان
(칼로파트 아바시온, khelaafat 'abaasiyaan)
영어Abbasid Caliphate
어바시드 캘러페이트
Abbasid Dynasty
어바시드 다이너스티
Abbasid Empire
어바시드 엠파이어
한자黑衣大食
흑의대식
한국어아바스 칼리파국/압바스 칼리파국
아바스 왕조/압바스 왕조
아바스 제국/압바스 제국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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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깃발
الراية السوداء
ar-rāyat as-sawdā

검은 깃발(아랍어: الراية السوداء ar-rāyat as-sawdā) 또는 독수리의 깃발(아랍어: راية العقاب rāyat al-ʿuqāb), 혹은 단순히 깃발(아랍어: ‏ الراية ar-rāyah)은 아바스 칼리파국의 공식적인 국기였다. 본래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용하던 깃발 중 하나로, 이슬람 종말론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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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무렵, 아랍 군대들은 전장에서 아군을 식별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붉은 터번이나 정사각형 깃발 등 표준적인 상징물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무함마드의 출신 부족인 쿠라이시족은 검은색의 터번과 하얀색-검은색 혼용의 정사각형 깃발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무함마드가 예언하기를

"훗날 종말의 날이 다가오고 마흐디가 도래할 때, 호라산에서 검은 깃발을 앞세운 군대가 몰려올 것이다."

한편, 라시둔 칼리파국의 4대 칼리파였던 알리는 적의 군대와 맞서 싸우면서 흰색의 깃발을 사용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알리를 무찌른 무야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 칼리파국 역시 국기로 흰색 깃발을 채택하였다.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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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의 차별 정책에 반발한 이들은 747년 호라산에서 아바스 혁명을 일으키면서 검은색 깃발을 공식적인 상징물로 채택했다. 그 이유는 불명이지만, 아마도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국기가 흰색 깃발이라 적군과 확연히 대비될 수 있었으며, 또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종말의 날에 오는 군대"의 느낌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아바스 칼리파국과 맞섰던 세력들은 모두 그들만의 색깔을 내세웠다. 예를 들어 우마이야의 마지막 칼리파인 마르완 2세는 자신의 군대를 붉은색으로 치장시켜 아바스 군대와 구분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나중에 아바스 칼리파국과 대립하게 되는 파티마 칼리파국은 흰색 깃발을 공식적인 상징물로 삼았다. 특히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무너뜨린 이후, 아바스 왕조가 수니파 이슬람을 국교로 내세우면서 자연스럽게 시아파 이슬람 세력들은 흰색 깃발을 사용했으며, 따라서 이후에는 흰색 vs 검은색의 구도가 마치 시아파 vs 수니파의 구도를 상징하는 것처럼 되었다.

시아파 세력들은 아바스 칼리파국의 검은색 깃발이 무함마드가 예언했던 그 검은 깃발이 전혀 아니라고 마구 비난했는데, 아바스 칼리파국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멸망의 날이 도래하지 않자 수니파 세력 역시 아바스 왕조의 검은 깃발은 무함마드가 예언했던 그 깃발이 아니라고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대신 무함마드가 말한 그 검은색 깃발은 더 클 것이며, 단순한 빚깔의 검은색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18세기 초에는 시아파 이슬람12이맘파를 공식 국교로 채택한 사파비 제국에 맞서, 미르와이스 호타크가 이끄는 수니파 아프간인들이 검은색 깃발을 상징물로 사용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호타키 왕조를 건국하기도 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압두르 라흐만 칸 역시 검은색 깃발을 사용했다.

19세기 후반, 영국령 인도에서 발흥한 아흐마드파는 검은색을 그들의 상징물로 채택했다. 특히 1939년에 그들의 "처음으로 게양된 국기Liwaa-i Ahmadiyy"에 검은색이 사용되었으며, 아흐마드파 제 4대 칼리파인 미르자 타히르 아흐마드는 흑백의 상징성을 계시와 예언의 개념으로 풀어 설명하기도 했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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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검은색은 그 역사성이 워낙 오래되고 상징성이 큰 덕분에, 여전히 범아랍권 국가의 국기들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 아랍 국가들의 국기에서 주로 등장하는 초록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을 한데 묶어서 '범아랍색'이라고 부르는데, 이 중에서 검은색이 바로 이 아바스 왕조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범아랍주의의 상징색들 중 하나가 마찬가지로 검은색이기도 하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주요 강령으로 삼는 테러단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깃발이 검은색인 것은, 아바스 칼리파국처럼 아랍권 전체를 아울러 칼리파 체제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 외에도 캅카스 남부의 일부 체첸 무장 투쟁 단체, 여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도 검은색 깃발을 내세우는 경우가 왕왕 있다. 만약 대부분이 그러한 깃발을 상징물로 내세운다면, 아바스 칼리파 체제를 계승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언급한 '종말의 군대'가 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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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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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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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시대의 필사본

750년부터 시작되어 1258년 몽골의 바그다드 정복 직전까지 이어진 아바스 왕조의 역사적인 시기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과 사람들에게 이슬람 황금기로 인식된다.[14] 이는 8세기 중반 아바스 왕조의 부상과 바그다드로의 수도 이전에서 기원했던 것이었다.[15]

아바스 왕조는 "학자의 잉크가 순교자의 피보다 더 거룩하다"는 「쿠란」의 문구와 하디스의 영향을 받아, 그 어느 이슬람 왕조보다도 지식의 가치를 더욱 강조했다. 이 기간 동안 아바스 왕조가 지혜의 집을 설립하고 문화적인 발전에 힘을 기울이면서, 이슬람 세계는 당대 과학·철학·의학·교육의 지적 중심지로 거듭났다.[15] 이곳에서는 이슬람 학자뿐만 아니라 비이슬람 학자 역시 세계의 모든 지식을 수집하여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동참했다.[15] 덕분에 소실되거나 역사 속으로 잊혀질 뻔 했던 고대의 수많은 고전 작품들이, 아바스 왕조 치하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대거 번역됨으로써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이슬람 세계는 로마, 중국, 인도, 페르시아, 이집트, 마그레브, 심지어 고대 그리스비잔틴 문명으로부터 받아들은 지식을 수집·종합했을 뿐만 아니라,[15] 오히려 더욱 발전 및 개량시킨 이른바 "문화의 가마솥"이었다. Huff에 따르면, "천문학·연금술·수학·의학·광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칼리파의 과학자들이 과학 발전의 선두에 있었다"고 한다.[16] 몽골의 침공으로 멸망한 뒤에도 그들의 업적은 계속 빛이 났으며, 훗날 몇 세기에 걸쳐 튀르크인, 히브리인, 라틴인들에게로 전해짐으로써[15] 역사에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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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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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시대에 편찬된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오늘날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민담·전설·우화들의 모음집인 《천일야화》이며, 이슬람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을 정도로 그 명성이 뛰어나다. 이 작품은 사산 시대의 페르시아 원본을 아랍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인도 전통 문학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특히 각지의 이야기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아랍 식으로 각색되고[b] 아랍 설화들도 수록되기 시작함으로써 원본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다. 나중에는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몇몇 설화들이 추가되었는데, 따라서 14세기 즈음에 이르러서는 이야기의 수와 종류가 각 작품마다 매우 다양해졌다. 《천일야화》의 다양한 이야기 중에는 알라딘, 신밧드, 알리바바와 같은 명작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형태를 갖춘 《천일야화》는 14~15세기 사이에 맘루크 왕조의 시리아에서 만들어진 아랍어 필사본이다. 그러나 이 사본은 282회 날 밤에서 중단된 불완전한 작품, 즉 미완성본이었다. 이외에도 16~17세기에 만들어진 사본들이 여럿 있었지만, 이들 역시 중간에서 끊겨서 정확한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의 동양학자이자 작가였던 앙투안 갈랑드가 시리아 필사본을 바탕으로 이집트의 판본과 여러 아랍 구전을 수록하고, 특히 상당 부분을 스스로 창작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1704년 최초의 서양 천일야화를 출판했다. 이후 1721년까지 영어로 전편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로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천일야화의 대부분은, 영국의 동양학자이자 탐험가인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이 소개한 영역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이전의 영역판들이 이슬람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기술하고 선정적인 부분을 삭제했던 것과 달리, 책의 내용에 아무런 손을 대지 않았으며 이전에 외교관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이슬람의 풍습과 아랍 사회상까지 연구한 다음 번역을 주도했다. 그의 최종 번역본은 1885년에 완성되었는데, 당시에는 지나치게 에로틱시즘을 강조했다고 비난받기도 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상당히 완성도 높은 사본이라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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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시의 발전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특히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상실페르시아계 왕조들의 부상 이전에 그 절정에 달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라일라와 마즈눈》으로, 본래는 아랍 이야기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제르바이잔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등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이슬람권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이것은 훗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이 영원한 사랑을 주제로 하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한편으로, 아바스 칼리파들은 예술 발전에 막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9세기 초의 유명한 아랍 시인이었던 아부 탐맘, 아부 누와스, 그리고 알 무타나비를 포함하여 수많은 인물들이 아바스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훌륭한 작품들을 집필해 나갔다.

유리에 퍼지면 무수한 색을 자랑하여 모든 혀들을 잠잠케 하고

연인의 부탁에 아름답게 말을 건네는 나긋나긋한 청년의 손에 재단사와 같은 튼실한 금빛 몸매를 과시하며

관자놀이에는 곱슬머리가 물결치고 재앙을 불러오는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일지어니, 그는 호라산에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윗가슴과 목을 훤히 드러내고 다니나니.

당신이 이 고상한 아름다움에 말을 건다면, 아마 이슬람의 교리조차 높디높은 산꼭대기에서 당장 던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일지어다.

모든 죄인을 타락으로 인도하는 그의 약탈을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그의 종교로 개종하여 알면서도 사랑으로 그 종교에 들어갈 것이었을지라.

만약 그가 참된 교리를 믿고 있지 않았다면, 알라께서 이 젊은이를 이토록 아름답게 구별하지 않으셨을 것이라 착각했을 터이니.

하룬 알 라시드 치세 동안 바그다드는 거리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수많은 서점들로 유명세를 떨쳤다. 751년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중동에도 제지 기술이 도입되었는데, 이것은 이슬람 문명의 발전을 대단히 촉진시켰다. 757년 사마르칸트에 이슬람 최초의 제지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전역에서 종이가 양피지를 대체했다. 책의 생산량도 폭증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약 700년 이후의 유럽에서 구텐베르크인쇄기를 발명한 것과 맞먹을 정도로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794년, 자파 알 바르막이 바그다드에 제지 공장을 지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아바스 궁정에서도 종이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는 바그다드 상업 지구의 한 거리 전체가 종이와 책만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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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철학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 중 하나는, 바로 "이슬람 문화의 틀 안에서 생산되는 철학적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이슬람 철학은 반드시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오직 무슬림들에 의해서만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들의 연구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교리가 이슬람 세계와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종종 철학자를 바꾸어 이지티하드 정신에 입각한 활기차고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영향력이 있는 독창적인 철학 작품들을 여럿 집필했다. 그들의 사고는 중세 시대의 유럽 철학자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마침내는 기독교 철학의 한 부분으로 융합되었다.

알 킨디, 알 파라비, 이븐 시나 등의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신플라톤주의를 이슬람을 통해 유입된 다른 사상들과 결합한다는 발상을 떠올렸는데, 이로 인해 성립된 것이 바로 아비센나주의였다. 한편 다른 영향력 있는 아바스 시대의 철학자들로는 알 자히스이븐 알 하이탐(알 하센) 등이 있었다.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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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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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세공 및 크리스탈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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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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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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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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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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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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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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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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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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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쥬르 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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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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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칼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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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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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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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 Abbasid Revolution against the Umayyad Caliphate adopted black for its rāyaʾ for which their partisans were called the musawwids.[1]Their rivals chose other colours in reaction; among these, forces loyal to Marwan II adopted red.[2] The choice of black as the colour of the Abbasid Revolution was already motivated by the "black standards out of Khorasan" tradition associated with the Mahdi. The contrast of white vs. black as the Umayyad vs. Abbasid dynastic colour over time developed in white as the colour of Shia Islam and black as the colour of Sunni Islam: "The proselytes of the ʿAbbasid revolution took full advantage of the eschatological expectations raised by black banners in their campaign to undermine the Umayyad dynasty from within. Even after the ʿAbbasids had triumphed over the Umayyads in 750, they continued to deploy black as their dynastic colour; not only the banners but the headdresses and garments of the ʿAbbasid caliphs were black ... The ubiquitous black created a striking contrast with the banners and dynastic color of the Umayyads, which had been white ... The Ismaili Shiʿite counter-caliphate founded by the Fatimids took white as its dynastic color, creating a visual contrast to the ʿAbbasid enemy ... white became the Shiʿite color, in deliberate opposition to the black of the ʿAbbasid 'establishment'."[3] After the revolution, Islamic apocalyptic circles admitted that the Abbasid banners would be black but asserted that the Mahdi's standard would be black and larger.[4]
  2. 주인공 샤흐리만은 분명 사산 제국의 왕이나, 셰예라자드의 이야기는 아랍 이슬람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바그다드·바스라·다마스쿠스와 같은 아랍 정복 이후의 도시명이나 하룬 알 라시드 같은 실제 역사의 사람들까지 등장한다는 점이 이질적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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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abari (1995). Jane McAuliffe, 편집. 《Abbāsid Authority Affirmed》 28. SUNY. 124쪽. 
  2. Crone 2012, 122쪽
  3. Hathaway, Jane (2012). 《A Tale of Two Factions: Myth, Memory, and Identity in Ottoman Egypt and Yemen》.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97f쪽. ISBN 978-0791486108. 
  4. Cook, David (2002). 《Studies in Muslim Apocalyptic》. Darwin Press. 153쪽. ISBN 978-0878501427. 
  5. Hoiberg 2010, 10쪽.
  6. Bosworth, C. E. (1982). "ʿABBASID CALIPHATE". Encyclopædia Iranica, vol. I, Fasc. 1, pp. 89–95.
  7. Canfield, Robert L. (2002). 《Turko-Persia in Historical Perspectiv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쪽. ISBN 978-0521522915. 
  8. “ʿAbbasid caliphate”. 《Encyclopædia Britannica. 2023년 9월 5일에 확인함. 
  9. “Abū Moslem Ḵorāsānī”. 《Encyclopaedia Iranica》. 22 November 2015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 November 2015에 확인함. 
  10. Finer, S. E. (1999). 《The History of Government from the Earliest Times: Volume II: The Intermediate Ages p. 720》. OUP Oxford. ISBN 978-0198207900. 
  11. Richards, D. S. (2020). 《The Chronicle of Ibn al-Athir for the Crusading Period from al-Kamil fi'l-Ta'rikh. Part 3: The Years 589–629/1193–1231: The Ayyubids after Saladin and the Mongol Menace》 (영어). Routledge. ISBN 978-1-351-89281-0. 
  12. Holt 1984.
  13. “الكتاب : التاريخ الإسلامي – الموضوع : المتوكل على الله "الثالث" محمد بن يعقوب المستمسك بالله”. 2008년 6월 11일. 2008년 6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6월 2일에 확인함. 
  14. Abbas 2011, 9쪽
  15. Gregorian 2003
  16. Huff 2003, 48쪽